20240720 - __해줄래?
●X(구 트위터) @YUMELAND60min 드림전력 참가작
●포켓몬스터SV - 페퍼 BL로맨스드림 (페퍼엑스)
●NPC × 메타픽션 주인공
●주제: __해줄래?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최근 고생했던 데우스에게 구름아이스를 줬는데요... 한 입 베어문 직후에 그대로 굳더라고요. 생각보다 더 차가워서 깜짝 놀랐나봐요."
티스푼마을 뒤편에 펼쳐진 남팔데아해. 에메랄드빛 바다와 수평선을 장식하는 노을. 규칙적으로 부스러지는 포말. 문장 그대로 그림같은 경치를 배경으로, 페퍼와 엑스는 나란히 해변을 거닐었다. 각자 신발은 한손에 든 채 나란히 새겨가는 발자국. 느릿느릿 여유로운 걸음이 사치스럽다.
"귀엽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남은 구름아이스는?"
"결국 다 먹었어요. 그저 놀란 것뿐이고, 구름아이스 자체는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엔 부지런히 먹더라고요. 하나밖에 못 사준 게 미안해질 정도였어요. 하지만 역시 구름아이스 하나로는 내가 아쉬워서-..."
페퍼의 물음에 엑스는 선뜻 회상을 이어간다. 언제나처럼 얌전한 어투였지만,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나 베시시 웃는 얼굴이 들뜬 기분을 증명한다. 페퍼는 기꺼이 귀를 기울인다. 계속 그랬던 것처럼.
허나 먼저 역할을 내려놓은 건 화자였다. 문득 엑스는 모호한 침묵을 내걸더니, 이윽고 더뎌진 발걸음을 우뚝 멈춘다. 애꿎은 모래사장에 떨군 시선. 착잡한 낯빛. 즐겁게 이야기를 듣던 페퍼도 덩달아 멈춰선 채 걱정스런 기색을 내비친다. 좋아하는 사람이 돌연 심란한 얼굴을 하는데, 신경 쓰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렵겠지. 페퍼는 엑스의 앞에 마주선 채로 표정을 살핀다.
"...엑스? 갑자기 왜 그래? 혹시 싫은 일이라도 생각났어?"
"으응,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페퍼가 어떨지 모르겠어서요."
"나?"
"네. 나로서는 내 추억담을 늘어놓은 거지만, 페퍼한텐 교훈은 커녕 공감도 이끌어낼 수 없으니까요. 지루한 이야기를 억지로 듣게 하는 건 아닐까, 갑자기 걱정이 돼서..."
말꼬리를 흐리는 엑스. 그건 무척이나 다정하고, 또 합리적인 염려였다.
조금, 아니, 상당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엑스는 '주인공'인 모양이다. 이 세계는 어느 게임시리즈의 신작이고, 엑스는 그 게임시리즈를 플레이하는 누군가의 게임기 속 주인공. 그렇기에 이 팔데아지방 말고도 여러 다른 지방에서 다른 삶을 몇번씩 살아봤다고 한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전제. 허나 엑스는 이런 일로 허언을 늘어놓을 위인도 아닐 뿐더러, 저나 주변인들에게 손을 내밀던 그 모습은 '주인공'이란 말이 제 것처럼 어울린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엑스의 비밀을 알게 된 후로, 단둘이 있을 때 페퍼는 종종 엑스의 '구작'의 행보들을 듣곤 했다. 언젠가는 칼로스지방의 미르시티에서 길을 잃은 엑스. 알로라지방의 에테르파라다이스에서 휴식을 취한 엑스. 또 방금까지는 하나지방의 구름시티에서 간신히 구름아이스를 산 엑스.
엑스의 염려는 지극히 타당하다. 'NPC'인 페퍼는 백날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도 이입할 수 없다. 모르는 세계의 모르는 시간대에서 일어난 사건들. 공감은 커녕 이입하고 상상하는 일조차 고되다. 알맹이만 두고 보면 역사학 강의를 듣는 거에 가깝겠지. 그렇기에 엑스는 돌연 불안해졌다. 페퍼에겐, 좋아하는 사람에겐 즐거운 추억을 많이 들려주고 싶다. 자신이 멋지고 좋다고 생각한 찰나들을 많이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건 정녕 페퍼에게도 즐거울까. 그저 내가 들어주길 바랐던 거라면 어쩌지. 일방적인 이해자를 원한 거라면...
"엄청 즐거워."
"......네?"
"엑스의 추억담 듣는 거, 엄청 즐거워."
망설임 없는 선언. 감히 바라지 못한 반응. 엑스는 고개를 들어 페퍼를 올려다본다. 커다랗게 뜬 눈에 놀라움이 들어찬다. 페퍼는 언제나처럼 미소한다. 사랑스러운 이를 보는 눈.
"몇번이고 말할 수 있어. 엑스의 추억담 듣는 거, 엄청 즐거워. 내가 모르는 엑스, 내가 본 적 없는 엑스를 많이 알 수 있잖아. 이번만 해도 그래. 엑스가 하나지방을 여행한 적 있다는 것도, 그때 파트너 중 골루그가 있었단 것도, 그 골루그에게 데우스라 이름을 붙여준 것도, 데우스에게 구름아이스를 사준 것도 알게 됐어. 나는 그게 즐거워."
"...정말, 이에요? 별세계의 이야기 같아서 지루하진 않아요?"
"전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건 알아도 알아도 더 알고 싶은 법이잖아?"
시원스런 곡선을 그리는 입매.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고른 치열. 호쾌하게 웃는 페퍼는, 치사할 만치 엑스의 불안에 잘 듣는다. 언제 침울했냐는 듯 덩달아 미소하는 엑스. 살풋 휘어웃는 눈가가 수줍다.
"그러니 계속 말해줄래? 엑스 네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 아까 하다 만 이야기도 포함해서."
"...네. 기꺼이 그럴게요. 그 이후에 골루그랑 카페를 갔는데요-"
남팔데아해에 새겨진 발자국은, 아직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